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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길 위에서

내 고향 마을

by 호미랑 2014. 3. 15.

 

내 고향 마을 풍경이다.

내 고향은 전라북도 장수이다.

평생을 고향을 지키다 환갑이 넘어 서울에, 인천에 사시던 부모님.

이제 자식들 다 커서 독립하고, 지금은 다시 고향에 돌아와 사신다.

 

 

ㅁ여기는 처음 집을 짓고 사시던 집이다.

원래 허술한 집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더 낡았다.

 

 

 

 

 

 

ㅁ 여기는 새로 지은 집과 뒤 산이다.

해발 700m 정도가 되는 고랭지이다.

요즘 배추, 사과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다.

 

 

 

 

 

ㅁ 여기는 아랫말 마을이 있는 곳이다.

교회에서 농구장과 수영장을 지어놓았다.

내가 어려서는 농구장도 수영장도 없었지만 논두렁 밭두렁 산골짜기를 뛰어다니면서 놀며 자랐다.

아버지는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나더러 알아서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학교만 다녀오면 산과 들을 싸돌아다니면 놀던 나는 초등 5학년 때 수원으로 전학을 갔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방학 때 내려오면 그 때는 아버지 고생하시는 것이 미안하여

나 스스로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나가 밭일, 논일을 도왔다.

내 청소년기 당시에 막상 아버지 돕는다는 마음으로 일을 나가지만 일을 해보면 무척 아팠다.

늦가을에 산중턱에서 두 팔로 안을 만한 무거운 소나무를 베어 그 한두 덩어리를 지게에 지고 길가로 내려올 때

어깨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한여름에 몇백 평이 되는 밭에 나가서 배추 주변에 난 김을 맬 때는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러고 일주일 보름 넘게 일을 하면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 고생하는 줄은 몰랐다.

무더운 여름날 며칠 일을 하다가도 내가 일하기 싫어 집에서 늦잠을 자거나 동네를 싸돌아다니거나

아니면 서늘한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거나 하며 일하지 않고 놀 수도 있었다.

여름이면 새벽4시가 넘어 일어나 새벽기도를 다녀와 방에 군불을 넣으시고 아침을 지으시며 아침을 들고 일을 나가서

저녁 해가 저물 8시가 다 되어 돌아오시도록 일하시던 아버지는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자율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체험도 해보며

너는 농삿일 같은 힘든 일은 하지 말고 공부 잘 해서 펜대 굴리며 편히 살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도시 근교에서 하는 텃밭일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