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옆에 있는 육사문학관에 간다. 육사는 퇴계 선생 후손으로 그의 오랜 할아버지가 다시 말하면
퇴계 선생의 5대 후손 원대처사가 퇴계종택에서 버스로 5분 정도 거리가 되는 마을로 이사를 간다. 호를 원대라 한
까닭은 벼슬과 명리를 멀리하고(遠) 산림 속에서 오로지 학문에 힘쓰고 덕을 쌓으며 살겠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 한
다. 처음 이곳은 말을 매어 멕여두던 곳이었다 한다. 이곳이 장사치들이 많이 다니던 곳으로 말이 많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말을 메어 두는데'가 '말멘데'로 '말먼데'로 '먼데'로 하여 먼(遠)과 데(村)가 되어 '원촌'이라는 이름
이 생겼다 한다. 최근까지도 이곳에 살던 노인들은 이 마을을 먼데라 불렀다 한다. (인용: 맨 아래 링크)
ㅁ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려 먼데 동네를 바라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ㅁ 지금은 도로가 뚫려 고갯마루가 낮아졌지만 옛날 고개는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다 한다. 이 고개를 넘어서는 순간
원촌 분지, 곧 먼데 하늘이 환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따라서 육사 시 '청포도'에서 '먼데 하늘'은 고유 명사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강사 선생님 주장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곳에 낙동강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있고, 그 강물 휘돌아가는 곳
에 절벽이 있는데 그것이 칼선대라는 곳이다. 이 칼선대 꼭대기 부분은 사람 하나 겨우 올라설 만한 공간으로 육사 시
'절정'에서 '한 발 재겨 디딜 곳'이라는 구절이 유래되었다 한다. 실제로 육사는 어린 시절 그곳에 올라가서 놀기를 좋
아하였다 한다.
ㅁ 육사 시를 좋아하는 상현이가 육우당시비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다.
ㅁ 차영민 선생님 강의. 오늘도 강의에 열공 중인 영신중 아이들. 이곳은 기념관에서 1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육사선생 생가터이다.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생가터가 수몰될 것으로 예측하여 안동시내로 옮겼는데 실제로 수몰되
지는 않아서 이 자리만 남아 있는 것이다.
ㅁ 기념관에서 사진 자료 등을 살펴보는 아이들
ㅁ 육사는 여섯 형제가 있다. 형제 간 우애가 매우 두터워졌다 한다. 또한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길 당시에 모두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데 이것은 모두 어머니 가르침 때문이라 한다. 육사 집안이 꽤 부유했던 것을 알 수 있는 사
진들이다. 명문가 후손 답게 인물도 좋아 당시 부르던 대로 '모던보이'였음을 알 수 있다.
ㅁ 육사의 친필 원고이다.
ㅁ 초중고 생들이 좋아하는 목판찍기 체험 코너도 있다.
ㅁ 기념관 개관을 축하하여 시인 김춘수 님이 축시를 썼다.
ㅁ 영상자료실에서 육사의 삶을 20분 정도로 정리하여 보여준다.
ㅁ 차영민 선생이 다시 한 번 육사 시가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ㅁ 퀴즈 상품으로 문화상품권을 내걸었는데 강사 선생님이 시를 외울 수 있느냐고 물어 아이들이 시를 외운다.
※ 아래 링크를 가보면 퇴계선생과 육사가 살던 원촌에 대한 정보를 참고할 수가 있다.
http://mail.swu.ac.kr/~cat/ae_tosanseowon_01.htm